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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감나무 가지치기를 시작했습니다. 임대료를 주고 전동 전지가위를 빌려 내일까지 이곳 감나무밭은 작업을 끝내야 합니다." 산청군 시천면에서 지리산담쟁이농원을 운영하는 손영욱(57)·이재순(57) 부부가 집 뒤편 감나무 밭에서 바쁜 일손을 움직이다 우리를 맞는다. 부부의 귀농이야기를 들으려면 작업을 중단해야 하는데 인터뷰하기가 여간 미안한 게 아니다.◇부산서 동네 슈퍼마켓 운영하던 부부"시부모님을 모시고 부산에서 동네 슈퍼마켓을 했습니다. 시아버지께서 운영하시던 것을 우리 부부가 이어받아 키웠는데 워낙 남편이 부지런한 덕에 슈퍼마켓은 잘됐습니다. 우리는 50대 후반쯤 두 사람의 고향인 산청으로 귀농할 것이라고 30대 때부터 마음먹고 있었죠. 그런데 시부모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데다 우리 부부마저 몸에 이상이 와 예정보다 일찍 이곳으로 오게 됐습니다. 6년 전입니다."빌린 기계 두 대 모두 놀릴 순 없어 남편 손 씨는 혼자 밭에서 일을 하고, 집으로 내려온 이 씨가 지난 기억을 더듬는다. 올해 채취한 고로쇠 수액과 함께 차상에 내놓은 곶감이 직접 생산한 것인지 빛깔이 참 곱다."시고모님 소개로 스물다섯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어머니께서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불명 상태가 되셨습니다. 4남 2녀 중 셋째인 남편은 이후 18년을 어머님 대소변을 받아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건강하던 시아버지마저 파킨슨병이 와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됐습니다."손영욱(왼쪽)·이재순 부부가 감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부모님 병시중에 가게 운영까지 부부의 도시 생활은 여간 고단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의식 없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자니 그것은 부부가 용납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부부에게도 몸에 탈이 생겼다. 손 씨는 스트레스로 만성 두통에 시달리게 됐고, 이 씨는 갑상선기능항진증이 왔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시아버지께 고향으로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습니다. 병원에 다니는 것은 지금보다 불편하겠지만 공기 좋고 물 맑은 지리산 아래에서 살면 부모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말씀드렸습니다."이 씨에게 시아버지는 인생의 조언자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고 했다. 옛날 산청에서 민선 면장을 지낸 시아버지는 엄했으나 며느리에겐 한없이 너그러워 이 씨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다 받아줬단다."남편 믿고 시작한 시집살이는 어린 신부에겐 많이 힘들었습니다. 견디다 못해 하루는 철없이 보따리를 싸서 집을 나왔는데 딱히 갈 곳이 없더라고요. 곰곰 생각하니 남편이 싫어 집 나온 것도 아니라 결국 다시 들어갔죠. 그런 며느리를 묵묵히 다독여줬던 아버님이셨습니다."고향으로 가자는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어미가 시골에 가겠다면 그렇게 하자' 그 한 마디가 끝이었다. 그리고는 불과 1주일 만에 이사를 했다. "슈퍼마켓을 처분해야 했는데 이전부터 우리가 귀농할 것을 안 주위 분 중에서 인수하려는 사람이 몇 명 있었습니다. 그중 한 분이 곧바로 인수하겠다더군요. 동네에서 오랫동안 운영하던 슈퍼마켓이다 보니 더러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간 사람도 있었는데 외상값 회수도 못 하고 장부만 챙겨 산청으로 왔죠. 우리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마도 야반도주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2010년이었다.◇건강 되찾은 부부, 곶감 만들기 정성갑자기 앞당겨서 결정한 귀농이었지만 부부는 30대 중반부터 차근차근 준비한 게 있었다.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조금씩 모은 돈이 목돈이 되면 친정어머니께 부탁해 이곳 감나무밭을 꾸준히 매입했었다. 감나무농장이 8000평 정도 됐으며, 24평 정도 되는 집도 리모델링해 둔 게 있었다. 미리 곶감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꾸준히 공부한 터라 귀농생활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안타깝게도 시부모님은 여기서 지내시다 몇 년 전 다 돌아가셨습니다. 계속 부산에서 모셨더라면 더 오래 살아계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불효를 저지른 게 아닌가 싶기도 하죠."하지만 부부는 귀농하고서 건강을 회복했다. 만성 두통에 시달렸던 손 씨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머리가 맑아졌고, 이 씨도 귀농생활 1년 만에 더는 약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 진단을 받았다. 농사일을 하느라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할 수 없단다."공부를 했지만 몸으로 부딪치는 농사는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감 농사를 잘 지어야 좋은 곶감을 만들 수 있는데 숙달된 농부가 아니다 보니 농장을 부부가 관리하기엔 벅찹니다. 둘이서 한 차례 풀을 베고 돌아서면 다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습니다. 오늘 전정작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은 초보여서 서툴기 짝이 없습니다. 산청군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영농교육에다 곶감작목반을 통해 전문가를 소개받아 감나무 관리부터 곶감 만드는 방법까지 배우고 있습니다. 고기를 얻기보다 고기 잡는 방법을 터득하는 게 내 농사를 잘 짓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 더디지만 하나하나 눈으로 보며 배우고 있습니다."가지치기 중 잠시 쉬며 이야기를 나누는 부부.부부의 노력 덕분에 지리산산청곶감축제에 곶감을 출품해 1등의 영광을 두 번이나 누리는 보람도 얻었다.부부는 곶감 생산이력제에 등록해 매년 약 5동(1만 개)을 생산한다. 이렇게 생산한 곶감은 전량 직거래로 판매해 남들보다 적은 양임에도 괜찮은 수익을 올린다. 주로 기업 등에서 선물용으로 대량 주문하는 게 많단다."몇 년 전부터 해마다 우리 곶감을 몇 상자 주문해 거래처에 선물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에게 선물을 받은 경기도 한 기업에서 전화가 왔더라고요. 매년 똑같은 선물을 받고 있는데 한결같은 품질에 만족한다며 같은 상품으로 몇백 상자를 구입할 수 없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전화를 받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한결같은 정성의 결과가 보상받는 순간이었다.두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인터뷰로 혼자 일하고 있을 손 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바쁜 일손을 빼앗아 남편에게 꾸지람 듣는 게 아닌지 걱정스러워 괜찮겠냐고 물었다. 이 씨는 "남들은 마누라 모셔 두고 사모님 소릴 듣게 한다는데 우리 아저씨는 일꾼으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제가 일을 더 많이 합니다. 그리고는 저에게 그 흔한 승용차 한 대도 뽑아주지 않습니다." 자리에 없는 손 씨를 타박하는 그였지만 투정마저도 마냥 행복해 보인다.
16.02.22.“아무 쓸모짝도 없는 고물들을 왜 모으냐?”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소년은 굴하지 않았다. 그 후 청년은 아버지 몰래 추수한 쌀 네 가마와 바꾼 카메라로 고향 산천을 찍었다. 또 박봉의 공무원 월급으로 생활을 꾸려주는 아내에게 감사하며 그는 기억 저편의 역사를 한곳에 모았다.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주남로 93-11. 주남저수지와 마주 보고 있는 창원향토자료전시관. 이곳엔 소년의 손때 묻은 물품 2만 8000여 점과 기억의 잔상이 담긴 사진 30여만 장이 살아있는 타임캡슐로 자리 잡고 있다.34년 공직을 함께한 카메라“저거 말똥가리네. 박 기자 잠시만 한 컷 먼저 찍읍시다 요즘 잘 안 보이던데 오래간만에 떠 올랐네.”양해광(66) 관장은 재빨리 소파 옆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냈다.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새 한 마리를 찍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단 한 번 들리는 셔터음 '찰칵'. 그 흔한 연속 촬영도 없이 단 한 장 촬영 후 인터뷰 자리에 앉는다.“요즘 주남저수지 주변에서 맹금류는 흔치 않은데 오늘 때마침 날아줬네. 아무튼 뜻깊네. 그런데 내가 뭐 자랑할 것도 없는데 인터뷰를 해야 하나요. 그냥 취미로 시작해서 모으고 찍은 것이 전부인데 남 부끄럽네요.”인터뷰 시작 전 취재에 손사래를 쳤던 그는 사진 촬영에 관한 질문을 던지자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수만 장의 셔터를 눌렀던 손가락은 카메라를 가리키고 있었다.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사진이론보다 아날로그 카메라로 실기를 먼저 배웠죠. 처음부터 수동 카메라로 입문해서 조리개, 노출 맞추고 셔터 스피드 조절하고 피사체를 담았죠. 지금이야 장비가 좋아서 자동으로 다 알아서 맞춰주지만 저는 수동 조작이 더 익숙합니다. 그리고 계획하고 촬영하는 것도 일상이 되어 한 번 촬영에 필름 한 장이죠. 카메라를 디지털로 바꾸었지만 아직도 촬영의 원칙은 '원샷 원킬'로 찍죠. 방법이 좀 구식이죠.”그의 카메라 촬영 방식은 일상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됐다. 치밀하게 계획하고 철저하게 실행하는 품성은 34년간 공직에 머무르면서 빛을 발휘했다. 1974년 창원군 농촌지도소에서 공직에 첫발을 디딘 후 2007년 12월 창원시 대산면 부면장을 끝으로 정년퇴직할 때까지 그는 카메라와 함께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2009년 4월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퇴직금과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주남저수지 앞 논 세 마지기를 팔아 '그때 그 시절에'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개관한 것이다.“1950년대부터 사용하던 생활용품을 국민학교 시절부터 모으기 시작했는데 개관 당시 2만 4000여 점 정도 모았었죠. 또 1969년부터 찍었던 사진이 30여만 장 되더라고요. 물건이나 사진이 제 개인 사물이지만 시간이 흘러 역사적 가치를 더하면 제 것이 아니라 공공의 것이죠. 그래서 전시관에 기증했죠. 그리고 미래세대에 잘 전하기 위해서 비영리법인도 만들었죠. 나라가 부강하려면 정치, 경제도 중요하지만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전수해야죠. 그래서 저는 도서관, 박물관, 기록전시관 등이 가장 중요한 문화의 척도라고 생각합니다.”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아버지의 기록 DNA와 낙동강변의 그리움양 관장은 경남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모산리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며 한학에 박식했던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일대기를 적어 어린 해광에게 주었다. 양 관장이 10살 되던 해였다. 또 부친은 농업에 관해서도 집안의 대소사에 관한 사소한 기록도 놓치지 않았고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양 관장에게도 기록하는 일은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또 어린 해광에게 영향을 준 것은 낙동강변과 논, 밭, 들판 등 고향의 풍경이었다.“'연못가에 새로 핀 버들잎을 따서요, 우표 한 장 붙여서 강남으로 보내면 작년에 간 제비가 푸른 편지 보고요. 조선 봄이 그리워 다시 찾아옵니다' 이 동요가 국민학교 2학년 때 배운 것인데 국어책에도 나와 있었죠. 학년이 올라 갈수록 전 학년이 그리워 책을 버리지 못하고 모으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네요. 지금까지 한 2만 8000여 점 물건을 모았는데 그것은 전부 제 삶과 관계를 맺었던 것들이죠. 10살 때부터 56년간 모았네요.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2000년 제가 귀향하기 전까지 잘 보관해주신 덕에 오늘날 향토자료전시관이 탄생할 수 있었죠.”고향의 그리움을 늘 간직하던 그는 대산초·중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의 경남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1968년 부산대학교 상업대학에 낙방한 그는 바로 고향으로 돌아와 군에 가기 전까지 3년간 농사를 지었다.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에 내려와 대산면 모산리에서 보낸 68, 69, 70년까지 3년이 내 인생에서 가장 때 묻지 않고 순수하고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자연은 위대하고 솔직했어요. 일한 만큼 대가를 돌려주었죠.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모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인지를 깨우쳐주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그 당시 내 전속 노래도 나왔어요. '날이 새면 물새들이 시름없이 날으는, 꽃피고 새가 우는 논밭에 묻혀서. 씨 뿌려 가꾸면서 땀을 흘리며, 냇가에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서, 조용히 살고파라 강촌에 살고 싶네' 나훈아의 '강촌에 살고 싶네'가 딱 나의 인생을 노래한 대중가요였죠.”쌀 네 가마와 바꾼 카메라대학입시에 실패하고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시절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 있었다. 바로 카메라였다. 1969년 같은 동네에 살았던 네 살 위의 이웃 형은 베트남전쟁에 파병을 갔다 돌아왔다. 그 형은 귀국하며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여러 가지 귀중한 물건들을 가지고 왔고 그중에 카메라도 있었다.“말로만 들었지 카메라라는 것을 처음 봤죠. 딱 한 번만 찍어보고 싶은데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해 가을 벼 추수가 끝나고 카메라를 사야겠다고 결심했죠. 당시에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쌀뿐이 없었죠. 부모님 몰래 쌀 네 가마를 리어카에 싣고 방앗간에 내다 팔았죠. 그 길로 부산 광복동 미화당백화점 뒤 카메라 골목에 가서 일본제 야시카 카메라를 샀어요. 그런데 카메라를 사면 뭐하노. 드러내놓고 찍을 수가 없는데요. 당시 촌에서 농사 짓는 놈이 카메라 들고 다니면 미쳤다고 했을 때죠. 필름 한 통이 쌀 세 되 값이었으니 사치품이지. 그래서 카메라를 숨겨가지고 다니며 찍었죠. 그래서 내가 원샷 원킬로 한 번에 한 장씩만 찍는 것도 그때 생긴 버릇이에요. 한 장을 찍기 위해 머릿속에서 구도를 그리고 언제 어떻게 찍겠다 계획을 하고 촬영을 했던 거죠. 그래도 그 카메라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왔네요.”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청년 해광의 눈에 들어온 고향의 산과 들은 사진으로 남아 역사의 기록이 되어갔다. 35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3개월 준비 끝에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그는 1974년 창원군 농촌지도소로 발령을 받았다. 제대 후에도 농업과 관련된 일을 계속하겠다는 그의 첫 번째 목표가 달성된 순간이었다."결혼 전까지는 대산면 모산리 고향집에서 여객버스 타고 마산 서성동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창원 군청이 있는 신마산 댓거리까지 통근을 했죠. 당시 버스가 주남저수지를 거쳐 다녔는데 그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시간 나는 대로 사진을 찍었는데 그 또한 주남의 역사가 되었습니다."공무원이 된 후에도 그의 카메라에 대한 애착은 운명처럼 이어진다. 농촌지도소 업무 특성상 잦은 출장에 그는 카메라와 동행을 잊지 않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 그의 사진 기록은 계속됐고 훗날 창원지역 농촌의 근대사를 증명해주는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다시 태어나도 공무원으로양 관장은 매일 8시 30분 창원향토자료전시관으로 출근을 한다. 그는 문화해설사 한 명과 함께 2만 4000여 점의 전시물을 관리한다. 2층 규모의 전시관으로 개관을 했지만, 전시관 운영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어 현재는 2층만 운영하고 1층은 음식점으로 임대를 주고 있다.“원래 1층에는 농경물품 전시관을 열려고 했죠. 모든 산업의 뿌리는 농업이잖아요. 또한, 제가 농업 관련해서 모은 것도 꽤 많은데 안타깝죠. 2013년 창원시에서 조례가 만들어져서 연간 500만 원 사업비가 나오고 있기는 하지만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무료로 운영하기 때문에 돈이 제법 들어가서 1층에 농경물품전시관 마련은 포기했죠. 그뿐만 아니라 전시관에서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습니다. 제가 찍은 창원의 자료 사진이 30만여 장이 있는데 이 모두가 필름이에요. 하루빨리 디지털로 변환시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야 하는데 이제 3만여 장 했습니다. 갈 길이 바쁩니다.”양해광 창원향토자료전시관 관장.전시관 한쪽 사무실엔 그가 36년 동안 찍은 사진 원본 필름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이곳 사무실 책상에서 하루에 필름 200여 장을 디지털로 변환하고 있다. 이것도 얼마 전에 마련한 장비 덕분이다. 그전에는 일일이 사비를 들여 필름현상소에서 자료를 구축했다. 양 관장은 이 작업을 평생 과제라고 했다. 사진을 찍은 것은 자신이지만 이제 그 자료는 모두와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매일 작업을 한다고 했다.“사실 불안하죠. 여기 있는 필름이 제 청춘과 바꾼 것이지만 또 이것은 살아있는 역사기록이라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렇게 원본으로 놔두었다가 분실되면 고스란히 역사가 묻히니 그것이 제일 두렵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변환 작업을 하고 있죠. 디지털 데이터가 구축되면 시청 자료실에도 보내고 지역 신문사에도 보내고 도서관에도 보내서 기록이 묻히지 않게 하는 것이 제 소망인데 혼자 하려니 힘에 부치네요. 그래도 돌이켜보면 이 모든 것이 공무원이 되지 않았으면 이루기 어려운 일이었죠. 전 아직도 공직에서 일한다는 생각으로 자료를 정리합니다. 그것이 퇴임한 공무원의 자세죠. 다시 태어나도 지방행정공무원이 제 꿈입니다."양 관장은 그의 사진을 책상 서랍 속 자신만의 자료가 아닌 역사의 기록으로 보존하고자 오늘도 책상 앞에 앉는다.사라지는 말과 언어를 기록하라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그와 창원향토자료전시관을 둘러보았다. 그는 '1973년 11월 15일 육군 제28사단 전차중대 발급 전역명령서' 전시품 앞에서 꿈 많았던 청춘 양해광을 회상하며 전시관의 의미를 설명했다.“이곳 전시관이 우리 삶의 흔적을 모아두었지만 그 본질은 자연입니다. 저기 보이는 필름통을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둔 것도 자연을 보호하고 기록하고 추억하려는 뜻이죠. 전 이곳을 다녀간 관람객들이 자연을 더욱 사랑하고 보호하고 지켜주었으면 합니다.”그리고 그는 또 다른 '역사의 기록'을 준비 중이라고 귀띔했다. 바로 지역민의 말과 글이었다. 그는 한평생 동고동락한 고향의 언어를 모으고 있다.“작년에 1945년부터 2015년까지 창원 대산면 모산리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모아 600페이지 '영상실록 모산리' 화보를 발간했습니다. 고향분들 도움으로 집집마다 다니며 옛 사진들을 모으고 편집해서 만든 모산리의 역사책이죠. 화보 발간 이후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말과 언어입니다. 함께 살아온 물건도 모았고 사진도 남겼으니 이제는 지역 방언을 모아 세상에 남겨 놓으려 합니다.”그는 2002년 창원시청 공보실 홍보기획계장으로 재직 시절 2500여 단어의 사투리를 가나다순으로 표준말 설명과 함께 기록한 <창원말사랑>이란 지역 방언 책을 발간한 적이 있다. 지금 양 관장은 이 기록을 보다 체계화하고 구체적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다고 했다.“2012년 결성된 경남방언연구보존회에서 경남을 넘어 부산, 울산까지 하나 되는 갱상도 표준말 책을 2016년 발행할 예정이죠. 올해는 방언을 모으고 기록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습니다. 토박이말을 보존하는 것이 바로 지역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이죠. 얼마나 우리말이 구수합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 별 이야기꺼리 없는 인터뷰 한다고 억수로 욕봤데이.”
16.02.12."<응답하라 1988>에 많은 사람이 열광했는데요. 드라마 속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건축물이 살기는 좀 편해지고, 그만큼 단열이나 기밀 성능은 좋아져 더 따뜻해지고 더 시원해졌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인간적인 정을 느끼던 그 공간들, 골목, 도시가 갖고 있던 특수한 이야기들이 없어져 버린 게 아닌가 합니다. 창원, 부산, 진주, 어디를 가도 똑같은 도시 형태, 똑같은 건축물이죠. 이런 것이 근대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긴 결과물이라면, 이제 인간의 본성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도시 전문가나 건축 전문가 역할이라고 봅니다."경남건축사회 조용범(54) 회장의 이야기다. "결국 건축은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의 삶과 철학을 소개한다.아버지가 정해준 미래 직업어느 날 아버지는 네 형제를 앉혀놓고 얘기를 꺼냈다. 사춘기에 접어들었거나 사춘기 문턱에 있던 남자아이 넷은 아버지 말에 귀를 기울였다."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때 아들들의 미래 직업을 정해주셨죠. 그중에는 군인, 학자도 있었고, 사업을 하라는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건축을 하라고 하셨어요."둘째인 조 회장은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사주도 보셨겠지만, 돌이켜보면 자식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취향이나 적성을 부모로서 눈여겨보신 것 같아요." 실제로 조 회장은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기, 만들기 등을 좋아했다."제가 건축을 안 했으면, 회화를 전공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림 그리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건축을 하면서 여행을 많이 다닙니다만, 사진 찍기보다는 스케치를 더 즐깁니다."또 조 회장의 할아버지는 김해에서 대목(도편수, 집을 지을 때 책임을 지고 일을 지휘하는 우두머리 목수)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아들까지 대를 이어 건축사 집안이다."아무래도 할아버지의 피와 재능도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교 2학년인 큰아들은 군에 가 있는데, 역시 건축을 전공하고 있죠."첫 건축 스터디그룹을 만들다경남대 건축공학과를 들어갔지만, 대학시절은 어려운 과정이었다. 그는 80학번인데, 건축과는 1979년에 생겼다. 건축 전공 교수는 1명뿐이었다. 2학년 1학기 이후 군 복무를 마치고 1984년 복학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교수님도 선배도 많이 없지만, 이대로 청춘을 보낼 수 없다고 느꼈죠. 우리 스스로 공부하고 새로운 건축 이론과 방법들을 익혀나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으로 건축 스터디그룹을 만들었습니다."부산, 대구, 서울 쪽에 있는 다른 대학 건축과와 교류하면서 함께 공부했다.스터디그룹 이름은 '스케일 건축연구회'. 84년에 만들어져 2014년 창립 30주년 행사까지 열 정도로, 전통이 있는 모임이 됐다. 학년마다 5명 안팎으로 열정이 있는 학생들이 모여 세미나와 심포지엄 등을 열고, 작품을 함께 만들어가면서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 특히 스터디그룹 출신 선배들은 전국에 있는 이름난 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다. 일종의 건축 전문가 양성소 역할도 한 셈이었다.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건축,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1987년 대학을 졸업한 직후 그는 마산에 있는 원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경험했다. 이때만 해도 건축과 졸업 이후 5년간 실무 경력을 쌓아야만 건축사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줬다. 조 회장 역시 선배가 맡은 프로젝트, 건축사가 진행하는 다양한 작업에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기본 설계부터 실시설계, 인허가 업무, 감리, 준공까지 여러 실무를 익힐 수 있었다.1993년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고 94년 1월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딴 '범건축' 사무소를 열면서 독립했다. 그해 가을 10월에는 결혼도 했다."가장 어려운 게 실무와 함께 공부도 해야 했는데, 그 시기에 가정도 꾸려야 했죠. 국가고시가 어려워 전체 응시자 중 합격률이 9% 정도였어요. 굉장히 어렵게 공부해야 하는 상황에서 일을 병행하는 어려움이 있었죠."실무에서 처음 맡은 일이 병원 건축이었다."원건축에서 병원 일을 담당하게 됐죠. 마산 석전동에 있는 이동식 정형외과인데, 스태프로 참여해 실시설계를 처음 맡았죠. 작은 로컬병원이었는데, 그걸 계기로 병원 설계를 많이 했습니다. 병원이라는 건축물은 특수성이 있거든요. 알음알음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다 지어진 건물을 둘러보러 오기도 했고, 의료계 원장님들을 통해 몇 개 프로젝트를 더 했었습니다."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병원 건축을 주로 하면서 건축사도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축에 관한 소신이다."한 건축사가 공장, 주택, 사무실, 학교, 공연시설, 의료시설, 종교시설 등 어떤 건물이든 사실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이 중 특화할 것이 있고, 전문성을 갖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서로 과잉 경쟁하지 않고, 함께 먹고살 수 있다고 봅니다. 저도 아파트 등은 잘 모르지만, 아파트 설계 의뢰가 들어오면 그걸 놓치기 싫어서 욕심을 낼 수가 있고, 사실 그러면 전문성이 좀 떨어지게 되죠."건축사의 사회적 역할범건축을 개업하고 15년이 지난 2008~2009년이었다. 지역건축사회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게 된 시기였다."제가 15년 가까이 건축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준 울타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봤습니다. 건축사협회가 저의 건축사 활동을 보호해주는 울타리였고, 창원YMCA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건축사들의 사회적 역할이 필요하다고도 느꼈죠. 40대 후반이었는데, 사회적 역량이 가장 활발할 때라고 생각했고요."창원건축사회 회장으로 4년을 활동하고, 통합 창원시건축사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지난해에는 경남지역 600여 명 회원을 위해 일하고자 경남건축사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먹고사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고민하고, 더불어 살면서 지속적으로 행복을 추구해야 하는 시점입니다."도내 건축사회 요직을 모두 거친 이력이다. 혹시 정치에 뜻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전혀 없다"며 웃었다.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입법 때문에 국회의원을 만나고 국토부를 방문해봤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대한민국에 건축사로서 국회에 들어간 사람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그래서인지 정부를 설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는데, '변호사, 의사, 약사 등처럼 건축사 출신 정치인이 나와 우리 입장을 대변해줬으면 합니다."건축 현안 진단조 회장은 지난해 4월 취임했다. 그가 건축사회 안팎으로 제기했던 건축 현안들을 짚어봤다."우선 설계·감리 용역비 현실화와 관련된 건축법 일부 개정안이 올해 1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습니다. 그동안 건축주가 직접 시공해온 소규모 건축물에도 감리자를 건축 허가권자가 지정할 수 있도록 했죠. 건축물 부실이나 안전사고 문제가 설계만이 아니라 감리 부실에서도 발생한다고 인식했기에 이 같은 법 개정 작업이 이뤄졌습니다."이 입법도 무려 3년 이상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조 회장은 설계비와 감리비가 현실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지금까지 감리비는 서비스 개념이 강했는데, 이제 건축 허가권자가 감리자를 지정하는 것으로 돼 있어 감리비도 제대로 책정해 지급하고, 감리 업무도 정상적으로 수행할 여건이 마련된 겁니다. 설계비도 IMF 직후 최저로 내려가 아직 현실화하지 않았는데, 감리비와 설계비가 동시에 현실화하지 않을까 내다보고 있습니다."조 회장은 건축사 업무 범위가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한다."지금은 근대화와 갑작스러운 개발 시대를 벗어나는 단계입니다. 주택이나 건축물 보급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고, 앞으로는 기존 뼈대에 안전 문제만 없다면, 내부 기능들이 현대 패러다임에 맞게 차츰 변해가야 합니다. 건축물 리모델링, 유지 관리에 건축사들의 미래 먹거리가 있지요."특히 인테리어나 리모델링은 화재, 피난 등 안전에 관한 문제를 꼼꼼히 검토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럼에도 내부 장식 요소로만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조용범 경남건축사회 회장."소방설비, 전기 등과 같이 인테리어 안에 숨어 우리가 지나쳤던 부분들이 이제는 자격이 있는 건축사의 고유 업무로 전환돼야 할 것입니다. 대한건축사협회에서도 이 내용을 법제화할 수 있도록 힘쓰고 있죠. 건축사들이 인테리어 부분을 터부시해왔는데, 지속적인 교육을 통해 바꿔나가야 한다고 봅니다."경남건축사회는 지난해 윤리위원회를 열어 9개월 회원 권리 정지라는 중징계를 내렸다. 편법으로 사무소를 운영하는 곳이었다. 전국 시·도 건축사회 중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처럼 조 회장을 비롯한 경남건축사회 집행부는 불법·탈법·위법 사무소를 근절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경남에서부터 이런 흐름이 확산해 다른 시·도에서도 관련 실태조사를 벌이고 있다.또한 조 회장이 취임 당시 약속했던 미래전략위원회는 올 3월 총회 승인을 거쳐 발족할 예정이다. 시장 개척단 역할도 할 미래전략위는 건축사회 새로운 역할과 먹거리를 모색한다.아직 역작이 없는 까닭조 회장은 건축사로 활동해오면서 자신이 설계해 기억에 남을 만한 건축물을 꼽아놓지는 않았다."몇 가지 애착을 두고 진행한 것이 있지만, 말씀드리기 어려운 것 같아요. 사실 지금도 그러한 과정에 있습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하면서 여전히 일하고 있기 때문이죠."세월이 흐르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만의 건축 철학이다."단지 책에서 나와 있는 지식,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들, 유행처럼 만들어지는 외관이나 디자인으로만 건축을 논하기에는 부족한 게 있다고 보거든요. 연륜이 쌓이고, 정말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깊은 성찰 뒤에 건축의 완성도가 생기는 게 아닐까 생각하죠. 그래서 좀 연세가 드신 선배 건축사님들의 활동이 안 되는 것도, 그 많은 경험과 연륜이 사장되는 것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동대문디자인프라자를 설계했던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 프랭크 게리,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같은 세계적인 건축가들도 60이 넘은 나이에 왕성하게 활동했지요. 대한민국에선 너무 트렌드 위주의 건축을 추구하다 보니까 선배 건축사들의 소중한 경험이 사장되는 것 같습니다."내가 살아갈 도시와 지역을 위해 관심과 참여를회장으로서 남은 임기는 2년이다. 도건축사회의 사회적 역할 강화, 회원 권익 신장에 주력하고 싶다고 했다."현재 대한건축사협회 산하에는 연구원이 있는데, 시·도 건축사회에는 아직 한 군데도 없습니다. 경남건축문화연구원을 설립해 건설 동향을 파악하고, 다양한 조사와 연구로 지역 균형발전을 유도하는 정책 개발 자료도 만들었으면 합니다. 이것을 행정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요. 건축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개발해 사회적 역할 강화에 힘썼으면 합니다."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물어봤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는 "조심스럽지만, 꼭 필요한 얘기"라며 말을 이어갔다."경상남도는 도민이 주인입니다. 시·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시와 건축에 국한해 말씀을 드리자면, 내가 살아갈 이 도시와 지역은 내가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적인 논리로 경남이나 시·군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와 건축에 관심을 두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경남에 시·군별로 18개 지역건축사회가 있습니다. 우리 삶의 터전은 우리가 지켜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양한 의견을 전해주시기를 바랍니다."
16.02.03.2014년 겨울 삼진미술관(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에서 처음 본 송영은(53) 작가 그림은 따듯한 색채로 꿈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캔버스를 할퀸 듯한 선이 이어졌지만 따스함이 묻어나왔다.평범한 주부로 살다 자신의 이름을 찾고 싶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송 작가가 오는 여름 초대개인전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창원 창동예술촌 한 골목에 있는 '송영은 아틀리에'를 찾았다.그녀의 화실은 미로 같았다. 만초집 옆 작은 문을 두드렸다.송 작가가 화실을 안내했다.좁고 기다란 복도를 두고 방 3개가 있다. 문을 떼 낸 가장 큰 방에는 소파와 책상을 뒀고 마찬가지로 문을 없앤 작은방은 작업하는 공간이다. 그 맞은편 방은 좌식 책상을 둔 사랑방이다."집에서 작업을 했었어요. 그런데 청소를 해도 바닥에 흘린 물감이며 냄새가 잘 빠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작업실을 구했죠."창원 마산합포구 창동작업실에서 만난 송영은 서양화가.그녀는 일주일에 3일 정도 창동예술촌에 나와 그림을 그린다.자신을 찾으려고 붓을 든 송 작가의 아지트다.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자란 그녀는 어린 시절을 산 깊은 곳에서 보냈다."시골에서만 살았어요. 운동장이 마당이었고 학교 교실이 놀이터였죠. 분필로 낙서하며 놀고 난로에서 콩도 볶아 먹었죠."푸른 숲에 둘러싸였던 그곳은 40년이 지난 지금 그녀에게 큰 영감을 준다."어린 시절에 스쳤던 풍경과 이미지가 여전히 선명해요. 온통 산이었고 자연이었죠. 우리 가족과 어울려 지냈다는 느낌을 항상 받아요. 딱 짚어 말할 수 없지만 함축된 무언가가 있어요."그녀가 창원에 터전을 잡은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대기업 협력업체 일을 하던 남편이 지인 권유로 창원지사 일을 잠깐 맡았는데 인연이 3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1990년 첫째 딸 백일을 앞두고서다."둘째 아들도 낳고 잘 살았죠. 어디 나가면 사모님 소리 듣고요. 누구 엄마라고도 불리면서요. 그런데 제 존재가 없더라고요."그녀는 누구에게 묻어가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0년 후 자신의 이름을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다.송 작가는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의 학부모 방과 후 수업을 신청했다. 6개월 정도 천숙년 작가에게서 수채화와 데생을 배웠다. 그녀는 아주 행복했었다고 말했다. 또 경남사회복지회관 미술 수업에서 공태연 작가를 만났다. 그녀는 5년 정도 배우는 데 매진했다. 물론 독학도 열심히 했다.하지만, 개인 집안 사정으로 그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몇 년간 마음이 복잡했다.그러던 어느 날 신창작미술협회에서 전화가 왔다. 성산아트홀에서 전시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녀는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마음먹었고 부스전에 참여했다.2012년 개인전과 부스전을 시작으로 그녀는 그림 그리는 데만 몰두했다.송영은 서양화가.지금까지 개인전을 4번 열었고 각종 국내외 전시회에서 초대전을 했다. 경상남도미술대전, 성산미술대전, 현대미술대전에서 상도 받았다. 현재 마산미술협회, 경남현대작가회, 경남예술나눔작가회에서 활동하고 있다.송 작가의 첫 그림은 구상(具象)이었다. 2012년 10월 창원 성산아트홀에서 연 첫 개인전은 커다란 장미로 가득했다.그러다 작품은 2014년 들어 변화한다. 그녀는 구상이 지겨웠고 깊은 작업을 하고 싶었다. 구상으로는 자신만의 색깔이 약하다고 생각했다.우연히 눈에 들어온 건 칫솔이었다. 그녀는 칫솔로 중첩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붓으로는 부족했던 질감이 나왔다. 힘에 따라 달라지는 균열도 좋았다."혼자 이것저것 다해봤죠. 두꺼운 종이를 찢기도 하고 실로 뭉쳐서 해보기도 하고요. 삼진미술관에서 본 할퀸 듯한 선은 칫솔로 작업한 거예요."그녀는 뿌리고 덮고를 반복했다. 구상이 가질 수 없는 '우연성'을 담으려고 애썼다.'소재의 특성을 강조해 시각예술의 본질에 다가서려고 했다'라고 말했던 그녀의 작품 세계를 다시 물었다. 쉽게 설명해달라고 부탁했다."시각예술은 눈으로 보는 예술이죠. 조각, 회화, 큰 성당 같은 건축물 모두 시각예술이에요. 저는 제 작품을 다양하게 표현해 보는 사람의 시각을 풍부하게 만들고 싶어요."송영은 서양화가.그녀는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처럼 되고 싶다고 했다.잭슨 폴록은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이며 20세기 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세계 화단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잭슨은 미술학교를 중퇴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추상 현대 최고 인물이죠. 삼류작가니 하는 조롱을 들었지만 자기만의 길을 찾아 최고가 됐죠. 저도 저만의 길을 걸을 겁니다. 작은 지역에서 활동하고 전공자도 아니지만 '송영은'만의 색깔을 추구할 거예요."
16.01.29.남들보다 한참 이른 30대 나이에 귀농해 인생을 재미있게 사는 부부가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면 둑방길을 손잡고 걷거나 때론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도 하며 여유를 즐긴다. 함안군 법수면 윤내리 2000평 비닐온실에서 파프리카를 재배하는 귀농 4년차 백승완(42)·박미애(40) 부부다.무대포 초보 농부 좌충우돌 귀농기"전혀 준비 없이 무작정 이곳으로 들어왔습니다. 특별한 계기는 없었죠. 주위 믿을만한 분이 '비닐 온실이 하나 나왔는데 해볼래?' 하더군요. 그런데 더 결정적인 건 아내 얘기였습니다. '우리 농사 지을까?' 하기에 '그럴까' 하고 내가 대답하고 무엇에 끌리듯 이곳으로 오게 됐습니다." 승완 씨가 귀농하게 된 다소 황당한 계기를 남 이야기하듯 들려준다.정말 30대 귀농이 '의기투합'한 부부 이야기가 전부였을까? 승완 씨가 당시 가졌던 마음속 이야기를 풀어놓는다."직장생활이라는 게 그렇지 않습니까? 한창 일할 나이인 마흔을 겨우 넘겼는데 명퇴 당할 수도 있고요. 막연히 생각했던 게 앞으로 농업이 괜찮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파프리카만 해도 올해는 시세가 많이 떨어졌지만 귀농을 결심할 당시엔 고소득 작목이라 가격이 좋았죠. 한번 도전해 볼만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백승완·박미애 부부.부부는 7년 전 결혼했다. 포항이 고향인 승완 씨는 처가가 있는 마산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당시 승완 씨는 직장이 김해였지만 미애 씨가 맞벌이를 해 마산에 집을 얻어 출퇴근을 했다. 직장도 사원복지제도가 잘 갖춰진 아주 모범적인 곳이었다. 1년에 두 차례 10일씩 휴가를 주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잘 아는 그런 회사였다고 했다. 그처럼 안정되고 사원 복지가 잘 된 회사에 다니면서 더구나 30대에 귀농을 꿈꾸는 게 가능했을까?"도시에서 직장생활 한다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보기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하기가 쉽지 않잖습니까? 더구나 내가 회사에 계속 다닌다면 3년이 지나든 10년이 지나든 현재 직장 상사들이 내 미래라는 생각이 들었죠."승완 씨가 말을 이어갔다."게다가 조직생활이라는 것이 상사가 퇴근도 못하고 일하는데 내가 먼저 집에 가겠다고 호기 있게 자리를 일어설 상황이 안 되잖습니까? 또 어쩌다 회식이라고 하면 늦게까지 술 마셔야 하고, 이런 걸 겪으면서 '과연 이것이 나의 행복한 미래일까?'라는 고민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내가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을 가꾸는 일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귀농 첫 해, 세 차례 태풍에 호된 신고식그렇게 마음먹은 부부는 2012년 여름 이곳에 들어와 생전 처음 파프리카 농사를 시작했다. 7월에 파종해 이듬해 6월까지 수확하는데 작황이 좋아 파프리카가 많이 달렸더란다. 부부는 한껏 꿈에 부풀었다. 많은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파프리카를 보는 부부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자연은 부부의 부푼 꿈을 여지없이 부수고 말았다.백승완·박미애 부부."그 해 경남 쪽으로 태풍 세 개가 지나갔습니다. 처음 태풍 두 개는 그나마 큰 피해를 준 것은 아니었죠. 그런데 세 번째 태풍 '삼바'는 달랐습니다. 그날이 우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걱정스러워 온실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온실이 바람에 들썩였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당장에라도 바람이 온실을 무너트릴 것 같은 생각에 밖에 나갔더니 다른 집 온실 비닐이 다 날아가더군요. 그렇게 마음 졸이며 발을 구르다 바람이 지나간 뒤 우리 온실을 보니 8동 중 3동의 비닐이 벗겨져 있었습니다."문제는 벗겨진 비닐이 아니었다. 파프리카 줄기가 천장에 매단 줄을 따라 올라가도록 집게로 중간지점을 잡아뒀는데 바람이 몰아치면서 파프리카 줄기가 쓸려 집게가 파프리카 열매와 잎을 다 훑어버렸더란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부부는 한참을 울었다고 했다. 가끔 TV나 신문에서 볼 수 있었던 실의에 빠진 농민·어민들의 한숨 쉬는 표정이 이해되더란다."그때 그래도 농촌이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고마움을 느끼는 게 우리에게 농장을 판 분이 자신의 농장도 비닐이 날려 피해를 봤는데 일꾼들을 데리고 우리 농장 복구작업을 하러 오셨더라고요. 하지만 집게가 훑어버린 파프리카 줄기는 맨 꼭대기 잎만 두세 개 달랑 남아있는데 뭘 먹고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식물의 자생력은 대단했습니다. 컨설팅하시는 분이 줄기 손대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시더군요. 살 놈은 살고, 죽을 놈은 죽는다며 오히려 손대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게 한 달쯤 되니 피해를 보지 않은 줄기만큼 따라가더라고요. 게다가 충격을 크게 입은 파프리카여서 작황은 안 좋았지만 집중출하 시기를 벗어난 시점에 수확을 해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었습니다."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태풍을 수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하우스에 불이 났다. 전기가 흐르는 선이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을 모른 채 농사를 지었는데 물이 떨어지면서 합선이 돼 비닐하우스 뒤쪽 바람막이 커튼에 불이 옮아 붙었던 것이었다. 이래저래 시련이 컸던 1년차였다.동네 주민의 엉뚱한 오해 "어, 우리말 한다"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도시를 탈출하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으니 남들이 겪지 않는 어려움도 많았다고 했다. 이곳에서 농사짓기를 권했던 분의 말만 믿고 무식하게 농사가 쉬운 줄 알고 들어왔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것이다. 부부는 이 정도로 힘든 줄 알았으면 안 들어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엄살을 부린다.백승완·박미애 부부.승완 씨는 "시설온실이라 작기가 시작되면 자리 비우기 어렵습니다. 사실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는 없지만 아직 초보이다 보니 마음 편히 멀리 떠나 본 기억이 없습니다. 휴가철이나 단풍철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관광버스를 보면서 '남들처럼 직장에 다녔으면 나도 저 무리에 속해 버스에 앉아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론 부럽기도 하죠. 그렇지만 금방 '저 버스에 앉아 있다면 오늘 당장은 기분이 좋겠지만 업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잘한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안합니다."전혀 준비 없이 덜컥 마을에 들어와 농사를 짓다 보니 마을 주민들도 의아해했던 모양이었다. 미애 씨가 귀농 초창기 마을 주민들과 얽힌 재미난 일화를 들려줬다."아마 이 동네에서는 거의 첫 번째 귀농 케이스쯤 되나 봅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우리를 다문화가정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죠. 남자가 외국인 여성과 결혼하고 농사를 지으러 온 것으로 생각했더라고요. 하루는 농장에 일하러 온 할머니들이 남편과 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어 한국말 한다. 한국사람이다'라고 하더군요. 친분을 쌓기도 전에 비닐하우스 일을 먼저 시작했으니 할머니들이 그렇게 생각할 만 했죠."둑길 걷다가 발견한 빈집, 소중한 보금자리로부부는 악양 둑과 가까운 곳에 산다. 여름철 부부가 손잡고 둑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는 즐거움은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기쁨이다. 집 앞 텃밭에 푸성귀도 심고 닭도 기르며 재미있게 산다. 크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아니지만 여유로운 삶을 산다고 자부한다."마산에서 처음 이사를 와 이곳에서 좀 떨어진 빌라에 살았습니다. 하루는 둑길을 걷다가 원두막에서 쉬려고 앉았는데 빈집이 하나 보였습니다. 아내가 '저런 집에 우리가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하더군요. 나도 같은 생각을 했지만 우리가 여기에 살게 되리란 생각은 못했습니다. 그래도 주인을 만나 이야기는 나누고 싶었죠."부부는 돌아오는 길에 동네 할머니를 만나 빈집에 대해 물었더니 주인을 잘 아는 집이라고 하더란다. 크게 기대는 안 해서 전화번호도 남기지 않았는데 운이 좋았다고 했다."한 달 정도 지났을 겁니다. 다시 둑길을 걷고 오다가 그 할머니를 만났는데 반갑게 붙잡더군요. 도시에 사는 집주인이 우리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젊으니까 임대하기로 했다고 하더라고요. 오랫동안 묵혀 둔 집이라 임대료는 적게 받는 대신 직접 수리해 살라고 해 그렇게 하기로 했죠. 이곳에서 산 지가 벌써 1년 좀 넘었네요. 사실 시골에는 빈집이 많습니다. 귀농자금이 넉넉지 않다면 이런 빈집을 활용하면 좋을 듯싶네요."말이 나온 김에 예비 귀농귀촌인들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었다. 승완 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를 풀어낸다."가장 먼저 농촌생활을 하려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농촌생활 즐기고 꿈을 찾겠다고 생각하면 좋지만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은 것 같습니다. 농사라는 게 어느 해에는 좋을 때도 있지만 나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한 해 농사에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몇 년 농사지으니 이젠 저도 익숙해졌습니다. 우린 벌어둔 돈도 없고, 지금까지도 번 돈을 빚 갚는 데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족하는 건 도시생활에서 찾을 수 없던 것을 여기서는 즐길 수 있죠."미애 씨도 한마디 거든다."농촌으로 오기 전 많은 사람을 만나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귀농귀촌 교육도 좋지만 내가 생활하려는 곳의 주민들과 만나 정보를 얻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우리는 무턱대고 들어오다 보니 귀농정책자금을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부분도 꼼꼼히 살펴보면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작물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으면 당연히 낫겠지요. 아무려면 '우리말 할 줄 안다'라는 오해는 받지 않아야죠."부부가 함박웃음을 짓는다.부부에게 찾아온 귀한 인연, 엄마·아빠 된다귀농 4년차 미애 씨는 자신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미래가 항상 순탄할 거라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이젠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한다.백승완·박미애 부부."이 정도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출은 평균 2억 5000만~3억 원 정도 되는데 난방비, 인건비 등 부대비용이 80% 가까이 들어가 순수익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시세가 좋지 않아 반 토막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여기 와서 지금까지 재투자 비용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첫 해 전기 난방시설 설치에 1억 원이 들었고, 이듬해 비닐교체에 3000만 원, 또 배지를 지면에서 높이는 벤치시설 설치에 1억 원이 들었습니다. 3년 동안 생각보다 많은 투자가 됐죠. 당분간 이런 비용은 줄어들 것이고 비닐온실 구입에 든 대출금도 계획대로 갚아가는 중이어서 우리가 잘 해내고 있다고 봅니다."승완 씨는 요즘 더 큰 만족을 느끼면 산다. 이전 직장생활과 비교해 수입은 많은 차이가 없지만 삶이 여유로워졌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고 했다."직장 다닐 땐 새벽 6시에 출근해 7~8시가 돼야 퇴근했습니다. 여유가 없었죠. 그런데 지금은 다릅니다. 내 컨디션 따라 쉬기도 하고, 또 필요하면 새벽부터 일하기도 합니다. 여긴 온 이후 운전하는 게 달라졌습니다. 끼어들기, 과속도 참 많이 했는데 이젠 그런 게 없죠. 한번씩 창원이나 마산에 나가면 운전하기가 겁이 날 정도입니다."미애 씨는 "여기 와서 제일 아쉬운 점은 마음대로 쇼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창원 마산의 대형 마트에 나가면 마치 신세계에 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아마도 아직 도시에서의 생활습관이 남은 탓이겠죠. 그렇지만 다시 도시로 돌아갈 마음은 없습니다. 다소 불편한 것은 있겠지만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행복이 더 큽니다."올해 승완 씨와 미애 씨에게는 참 귀한 인연이 찾아왔다.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마음고생이 심했는데 올해 마침내 그 인연이 부부에게 왔다."오늘은 정기검진을 받는 날입니다. 빨리 인터뷰 끝내고 병원에 가야 해요."은근히 인터뷰를 끝내자며 압력을 넣는 미애 씨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활짝 피었다.
16.01.25.